평택시 도일동에 원균장균 묘가 있다..
임진왜란당시 이순신 장군과 늘 대비되던 인물..
과연 그는 간신 이었을까?
역사는 늘 다양한 관점으로 봐야 될듯 싶다. 적어도 그는 용감한 장수였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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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 도일동에 있는 원균장군 사당..
버려진 꽃다발..
추모행사를 치룬것 같은데 행사 끝나고 나면 나몰라 인가?
역사속 인물에 대한 공경한 마음을 조금더 갖췄으면..
외관은 잘 꾸몄으나 내부는 조금 부실하다..
역사속의 인물에 대한 평가..
임진왜란당시 이순신 장군과 늘 대비되던 인물..
과연 그는 간신 이었을까?
역사는 늘 다양한 관점으로 봐야 될듯 싶다. 적어도 그는 용감한 장수였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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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 [元均, 1540~1597] |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자는 평중(平仲)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조산만호(造山萬戶)를 거쳐 부령부사(富寧府使)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부임한 지 3개월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
일본군이 침입하자 박홍이 지휘하던 경상좌수영은 저항도 못해보고 궤멸하고 말았다. 원균도 맞서 싸우지 못하고 있다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순신은 자신의 경계영역을 함부로 넘을 수 없음을 이유로 원군요청에 즉시 응하지 않다가 5월 2일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고 지원에 나섰다. |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이순신과 합세하여 적선 26척을 격침시켰다. 이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등에 참전하여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무찔렀다. |
1597년(선조 30년) 이순신이 수군통제사를 파직당하고 투옥되었을 때, 후임으로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해 6월 가덕도해전에서 패하였으며, 7월 칠전해전(칠천량해전)에서 일본군의 교란작전에 말려 참패하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가 죽은 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다시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3년(선조 36) 이순신·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릉군 (崇錄大夫議政府左讚成兼判義禁府事原陵君)이 추증되었다. 선조가 그를 선무공신으로 책록한다는 '원릉군 원균 선무공신 교서'는 보물 제1133호로 지정되었다. 이 교서는 왜적을 격퇴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데 대하여 공을 기리고 포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그를 새롭게 평가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
2. 이순신과 원균의 생각이나 이념의 차이점 |
1. 두 사람간의 성격차이 |
- 이순신은 치밀하고 세심한 성격인 반면 원균은 전형적인 무장스타일이었다. 일처리에 있어서도 기록하고 분석하는 이순신과 그렇지 못한 원균은 많은 차이점이 있었다. 특히 임진란 초기에는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의 지휘권이 일원화되어 있지 못했다. 따라서 전장에서 지휘권의 혼란이 있었으며, 그 와중에서 두 사람간의 불화가 심화되었다. 두 사람간의 불화는 조정에서도 골머리였는데 결국은 원균을 충청도로 발령함으로써 임시방편을 삼고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새로운 직책을 만듬으로서 지휘권을 일원화해 혼선을 없애고자 했으나 그 통제사라는 새로운 직책은 많은 장점이 있었지만 두 사람간의 불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 |
- 난중일기에 세번째로 많이 나오는 문장은 "부하들과 밤새 의논을 했다."” . 장군은 자주 한산도 운주당에 부하들을 불러 술을 마시면서 의논을 했다. 이 점이 원균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이순신 장군은 아랫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고, 이 시간을 통해 부하들의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전쟁 중에서도 틈만 나면 활을 쏘며 스스로를 다스렸다. 이것은 자기개발에 잠시도 게으르지 않았고 항상 일기에 아프다고 할만큼 불안하고 고통속에서도 국가를 구하려는 강한 의식의 소유자라는 점이 원균과 다른 부분이다. |
2. 리더십 측면에서 근본적인 차이 |
이순신은 군사를 부릴 때,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안다는 점이다. 이는 전략의 기본으로 특히 군사력 면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경우에는 더욱 중요하다. 이순신은 훌륭한 전략가로서 23전 23승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역사에 남길 수 있었다. |
3. 장계를 이순신이 몰래 단독으로 올린것에 대한 원균의 적개심 |
원균의 입장인데, 이순신과 원균, 즉 전라도와 경상도 수군의 연합함대는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조정에 장계를 올리는데 이 장계를 서로 같이 올리기로 합의해놓고 이순신이 몰래 단독으로 올린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 간의 경위가 어쨌든 원균이나 조정의 입장에서는 이렇고 알고 있었고, 원균으로서는 이순신에 대해 크나큰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 장계로 인해 이순신은 일약 가선대부로 품계가 승진하게 된다. 이순신으로서는 출세의 발판이 된 셈이죠. 임란기간 동안 비록 형식적으로는 이순신함대와 원균함대의 연합함대였지만 주력이 이순신함대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4. 이순신과 원균을 벗어난 중앙권력의 세력다툼. |
이순신의 가장 큰 배경은 유성룡이다. 유성룡이 없었다면 이순신도 없었을 겁니다. 그 정도로 유성룡이 이순신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리고 원균의 배경은 윤두수, 윤근수 형제이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조정의 의논이 둘로 나뉘어 각각 편드는 바가 있는데, 순신을 천거한 것이 나였기 때문에 나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은 원균과 합세하여 순신을 공격하기에 온갖 애를 썼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런 중앙의 권력다툼의 틈바구니에서 두 사람의 간격은 더욱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체는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조정에서도 여러차례 거론이 됐었고 어전회의도 열렸는데 선조는 끝까지 원균을 감싸고 있고, 윤두수와 김응남 등은 통제사의 교체를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유성룡은 화를 피하고자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두둔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통제사의 교체를 둘러싼 여러 갈등 양상에서 한가지 알 수 있는 점은 중앙의 권력자들은 주로 원균을 두둔하고 있으며, 전란과 직접관련된 지방의 관리들은 이순신을 지지한다는 점이다. |
3. 원균은 정말 나쁜사람인가? |
원균(1540~1597)은 무과에 급제한후 비교적 빠른 승진을 거듭한다 함경도의 조산만호가 되어 오랑캐를 토벌한 공로로 부령부사로 몇단계 승차했으며 이어 종성부사가 되었다 원균은 주로 육군의 관직을 맡으면서 북쪽의 오랑캐를 상대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원균보다 5살 어린 이순신은 거의 미관말직을 전전했는데 그가 정읍현감이 된 것은 나이 오십이 다돼서 였다. 원균과 이순신은 서울 건천동 한 마을에 살았다 유성룡과도 한 이웃을 하고 있었다. |
사실 이순신의 입장에서 원균은 군대의 대선배다 품계 역시 원균은 이순신 보다는 한참 높았다 당연히 이순신의 입장에서는 원균을 깎듯이 예우해야 한다. 1591년 2월 이순신은 유성룡의 천거로 무려 7단계를 뛰어넘는 전라좌수사로 임명된다 당연히 반대여론이 비등했다. 이에 원균은 뒤늦게 경상우수사로 임명된다. 물론 서열은 경상우수사가 한단계 위였으나 경상우수사 직전까지는 오히려 이순신 보다한단계 낮은 종성부사 였으니 원균에게 인간적 감정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
원균이 동래에 부임했을때에는 전쟁발발 불과 3개월 전이었다. 원균 역시 전열을 재정비 하는데 힘썼지만 이순신과는 달리 원균은 주위의 협조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
이순신이 백의종군 할 당시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를 다시 맡았고 도원수 권율과의 견해차이로 곤장까지 맞는 모욕을 당하다가 출전하여 전사한다 원균은 한산도에서 패전하여 육지로 도망하다가 왜적의 칼에 죽었다고 한다. |
이순신은 원균이 전사하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고 그역시도 전사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도주하는 왜적을 쫒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좋은 선,후배로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수도 있었을터인데 끝내 원균과 이순신은 서로 각자의 길을 가고 말았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는 원균 그리고 이순신을 장군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순신은 분명 국난을 극복한 훌륭한 장수이다. 그러나 원균 역시 군인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려고 한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이들 두사람의 갈등은 인간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어찌할수는 없을 것이다. |
원균은 아무리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주저함이 없었고, 항상 앞장서서 주어진 임무를 이루고 마는 용맹스러운 장군이었으며, 공과를 탐하여 다투기를 삼가고, 오직 나라를 염려하여 장열하게 산화한 신화 같은 존재임은 분명하다. |
출처 : 이재범의 `원균을 위한 변명` |
평택시 도일동에 있는 원균장군 사당..
버려진 꽃다발..
추모행사를 치룬것 같은데 행사 끝나고 나면 나몰라 인가?
역사속 인물에 대한 공경한 마음을 조금더 갖췄으면..
외관은 잘 꾸몄으나 내부는 조금 부실하다..
역사속의 인물에 대한 평가..